불청객에게 받은 요구르트 40병 :: 2009.02.25 01:55

마지막 부 수련은 중·고·일반부 대상이기 때문에 초등부 수련생보다 좀 더 의미 있고, 알차게 지도해야 한다.
마지막 부는 유동성 있는 수업전개를 위해 수련계획표 없이 그날그날에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마지막 부 시간이 다가올수록 약간은 압박감이 생기기도 한다.

어제 역시 고민에 고민하였고 조만간 있을 종별태권도대회를 대비하여 몸통 보호대를 입고 발차기 수업을 진행하였다.
조만간 대회를 준비하는 내용의 수업을 이어갈 생각이다.

화요일은 보통 마지막 10분여를 남겨놓고 기초체력 운동을 하는데 어제는 본 운동의 강도가 좀 높았던 탓에 좀 일찍 기초체력운동으로 전환했다.

한창 끙끙거리고 있는데 아저씨 한 분이 들어왔다.
학부형인지 알고 정중히 물었는데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술 한잔하고 오신 것이다.
다시 물었더니 이런~ 도전하러 왔단다. --;

예전에 다른 도장에 있을 때는 칼을 들고 온 분도 계시고, 여기 와서도 일전에 그런 분이 계셨는데 그때는 조용히 돌아갔었다.
이번에는 좀 달랐다.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팔뚝이 굵고 어깨가 잔뜩 벌어진 것이 운동 꽤 하셨던 모양이다.
뭐 아무튼 술에 취한 모양이라 조용히 설득하며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고집이 좀 있는 양반이었다.

"선생님이 저랑 겨뤄서 이긴다 한들…. 제가 이긴다 한들 무엇이 남습니까?"
"……"
"아들 같은 수련생들이 보고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다음에 술 안 드시고 오시고 오늘은 그만 돌아가십시오."


도장으로 들어오려 길래 팔을 잡아 못 들어오게 막았지만, 끝끝내 들어와서 도장 중앙에 떡 서버렸다.
마지막 부 수련생들은 이미 침묵으로 사범님의 대응을 살피고 있었다.
평소에 중·고등부 수련생들이 조금만 어긋난 행동을 해도 바가지를 긁었던 터라 더욱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원하는 것이 이런 것이니 마음대로 때리십시오.
맞아 드릴 테니 대신 성인인 만큼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조금 주춤했다.
그래도 역시나 고집이 있으셔서 곧 한 번 해보자는 자세를 잡으셨다.
덤벼들더니 한쪽 팔로 몸을 밀치며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다 술기운에 휘청하며 자신이 넘어져 버렸다.
그렇게 나를 넘어뜨리려다 자신이 중심을 잃어버리기를 여러 차례…….
그냥 넘어져 드렸다.
그랬더니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태도에 힘이 빠졌는지 가겠단다.
고생했으니 음료수 사주겠다기에 집에 아이들 사다주라 했더니 아이가 없단다.

밖으로 나가 요구르트 20병들이 2묶음을 사오셨다.
끝났나 보다 했는데 땅에 놓더니 다시 해보잖다. ㅜ,.ㅜ;
수련생들에게 옷 갈아입으라 하고 다시 도장 중앙에 섰다.

"선생님 태권도에서는 겨룰 때 넘어뜨리는 기술은 쓰지 않습니다.
발차기로 상대를 차는 기술을 주로 씁니다."


몇 번 연습하더니 또 덤벼드시며 밀어 차는 발로 내 아랫배를 차버렸다.
이어서 엉성한 돌려차기로 팔꿈치 쪽으로 찼다.
두 번 다 그대로 서서 맞았다.
잘 참고 있다가 그 순간 표정관리에 실패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일격을 가했다.

"좋으십니까? 이렇게 누군가를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발로 차시니 기분이 풀리십니까?"

나는 일순간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아저씨의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조용히 나를 끌어 않으시며 사과하셨다.
날씨가 건조해 피부가 가려워 팔을 긁었는데 아까 맞은 데가 아프냐며 걱정까지 해주신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냐고 물으며 기억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번에 다시 맨정신에 한 번 꼭 붙어보자고 하시고 가셨다.

마지막 부 차량운행을 하는데 제자가 괜찮으냐고 물어온다.

"그럼~ 괜찮지…. 사범님한텐 흔한 일이고, 그것도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관장님은 동네에서 학생들이 불량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못 본 척하지 않으셨다.
나는 사범으로서 도복을 다시 입은 후로는 관장님이 몸소 가르쳐주신 것을 실천했다.

비록 나보다 어른이지만 도장으로 가르침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감정적 대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웠다.
어제와 같이 참고 참아 그가 깨닫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내가 이길 수 있음을 직감한다면 때로는 상대를 꺾어서 깨닫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한다.
물론 내가 질 것 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몰아야겠지만 말이다. ㅋㅋ

나는 왠지 좋은 일한 것 같은 느낌으로 마음이 가볍다.
이래서 '맞은 놈은 펴고 자도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라는 말이 있나 보다.
  • | 2009.02.25 05:37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하하...재미있기도 하지만, 사범님은 참 대담하시고 차분한 성격을 갖고 계시는군요.
    제가 한국을 떠나기 바로전에 1년정도 학원에서 성인 영어회화를 가르쳤었는데, 실직자의 재 취업을 위해서 정부 보조금으로 영어수강을 하게 하던 프로그램때문에 아침 6시 회화반에 참 학생수가 많았었지요. 그중 가장 열심히 하시던 아저씨 한분이 계셨었는데, 사시는게 무척이나 힘드셨었는지 밤을 새우며 술을 드시고 만취 상태로 아침 수업을 오셨던 기억이 나네요. 취기가 높아서 수업중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악을 쓰시다가, 제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셔서 "그러지 마시고 좀 집에서 쉬다가 내일 다시 오세요."라고 보내드렸는데...

    그날 이후론 자취를 감추셔서 십년이 넘은 지금까지 괜히 씁슬한 기분이 들어서 아직까지 기억이 납니다. 히말라야 등반대로 활동하시다가 동상으로 손가락을 다 잃으신 분이셨는데, 요즘은 뭐하시는지도 궁금하군요.

    하긴 저희 도장에도 한달 전 저녁 8시 마지막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UFC (Ultimate Fighting Champion) 티셔츠에 화려한 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청년이 불쑥 들어와서 사범 한사람하고 겨루고 싶다고 대뜸 도전장을 내는걸 보긴 했습니다만 (발을 이용해서 타격을 주로하고, 넘어진 상대를 가격하지 않는걸 원칙으로 하면서 수련하는 무술이니 Jujitsu실력을 발휘하고 싶으면 다른곳을 알아보라고 말해주고 보내긴 했습니다만...) 세상 살다보면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지요. 이런 다양함과 예측할수 없는 사람들이 다 한데 버무려져 사니 삶이란게 무섭기도 하고 재미도 있는것 이겠지요.

  • 김사범 | 2009.03.10 09:20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쉽지 않은 일을 겪으셨네요. 저도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걱정이 앞서네요.

  • 박사범 | 2010.03.11 23:55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그러게말입니다... 흠...저도 저런 상황에놓여있다면.... 마루님처럼 그렇게 대응할수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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